사실 서울행 비행기를 타면서 서울에 대한 어떤 글을 쓸 목적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별스러운 호기심은 바로 이 장면에서 시작되었다.

어떻게 이런 장면이 가능하단 말인가!?

건물은 없고 간판만 있다. 좋다/나쁘다의 문제를 떠나서 이런 장면은 아마 지구상에서 그 비슷한 예를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이런 장면이 한국적 현대 도시의 특별한 정체성이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 문제는 비단 서울에만 적용되는 상황이 아니다. 사진은 신도시의 한 거리.

만약 건물이 어떻게 생겼는지, 이 건물의 외장재료가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정말 눈을 씻고 자세히 봐야한다. 그러나 그렇게 노력을 기울인다고 해도 아마 건물 자체를 확실히 인지하기에는 상당한 건축적 '상상력'이 필요할 것이다. 사진은 한 아파트촌의 상가건물.

어떻게 이런 도시의 광경이 가능한지 궁금해졌다. 일단 호기심이 생기니 서울시내를 움직이는 동안에도 할 일이 생겼다. 버스나 택시에 타건, 길거리를 걸어다니건 가로의 건물에 간판이 메어달리게 하는 그 '보이지 않는 힘'을 찾느라 눈길을 멈출 수가 없다.

도시 간판의 본래 목적은 간판뒤에 있는 건물 (또는 공간) 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를 제3자에게 알리고자 함이다. 식당으로, 약국으로, 병원으로, 은행으로... 아마도 제 2/3차 산업에 해당하는 그 모든 업종이 그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서울은 전세계의 그 어떤 도시보다도, 자신을 알려야 하는 업종이 많고 다양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자신을 알려야 한다'는 단편적인 사실 뒤에, 많은 도시적 징조가 숨어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흔히 보는 유럽의 서민적인 거리. 그렇게 보면 참 이곳은 별로 자신을 알릴 일도 없고, 또 그러지도 않는 도시이다. 그러나 이 거리 건물들의 모든 1층은 자신을 알려야하는 상점이다.

2002년 7월 23일 저녁9시, 한 방송국의 뉴스를 보고 있자니, 이런 정보가 덤덤한 뉘앙스로 흘러 나온다.

"1991년 100만대이던 서울의 자동차수는 2002년 200만대를 넘어섰다. 서울시 인구 중 2가구당 1세대 꼴로 자동차를 보유하고 있으며, 이 중 76%는 자가용이며, 자가용중 88%는 평시 홀로 운전자이다. (즉 서울시 전체 차량 200만대중 133만대 가량이 평상시 '홀로 자가용 운전자'에 의해 운전된다 는 말이다 )
그러나 같은 기간 도로증가율은 3% 증가에 그쳤다.... "

도시를 구성하는 관점중에 기조에 묻힌 그러나 핵심적인 두 가지 다른 생각이 있다. 이것을 혹자는 유럽식 도시 vs 미국식 도시 라고 부르기도 하고, 혹자는 자연발생도시 vs 계획도시 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생각 차이의 핵심은 차량과 사람중에 누가 우선권이 있는지에 있다.

어디에 중요성을 두는 지에 따라 도시계획의 많은 점이 틀려진다. 서울은 원천적으로 이 두가지 개념이 혼재된 곳 (강남 vs 강북) 이지만,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후자 (미국식 혹은 계획도시) 쪽에 가깝다. 격자체계로 개발된 강남은 말할 것도 없지만, 자연 발생적인 강북 또한 보행 자 중심 도시개발이 아니라 차량중심 개발방식으로 모습을 달리한 것이다.

여러분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종로나 명동을 떠올리며 이 말에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객관적인 판단을 위해서는 '자가용'을 사용하지 않고 직장에 출근할 수 있는 인구의 비율을 고려해야 한다. 이 점에서 강북 또한 보행자 중심 방식으로 개발되었다고 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유럽의 한 도시연구기관의 조사에 따르면 자가용을 사용하지 않고 도보나 대중교통을 이용한 출근율이 50%가 넘어야 엄밀한 의미로의 '보행가능도시'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고 한다. (실재로 파리 등 몇 개의 대도시를 제외한 서유럽 도시의 99%가 이 관점을 만족시키는 '보행가능' 도시이다.)

강남쪽에서 강북쪽으로 본다. 남으로 남으로 확장되는 '강남'은 실재로 그 크기만으로도 이미 하나의 초거대 도시이다. 이 사진의 가장 아래 지역에서 가장 위의 지역까지 출퇴근하는 사람들은 하루 중 얼마의 시간을 차속에서 소비하고 있을까?

이 말은 물론, 도시 생활권의 크기에 대한 잦대일 수도 있고, 대중 교통망의 효과성에 관한 것일 수도 있다.

보행이 불가능한 도시란 , 도시의 범위가 극단적으로 넓거나, 혹은 도로를 제외한 대중교통 (버스, 지하철, 트램...) 이 부족해서, 출퇴근 시간이 하루 근무시간의 25%를 넘는 상태를 이른다. 즉 하루 8시간이 법정 노동시간이라고 한다면, 그 도시에 사는 모든 사람의 출퇴근 소비시간은 2시간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서울의 남쪽 배드타운인 분당에서 강북의 업무 중심지 을지로로 출근하는 K씨의 경우, 하루에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며 4시간 가량을 출퇴근에 할애한다고 하니, 이쯤되면 서울의 도시적 '효율성'에 대해서 심각히 생각해볼 지경에 이른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 도로 교통망의 불예측성 (교통체증으로 인한) 까지 더해지면 한층 더 심각해진다. 말하자면 너무나 비대해진 도시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의미없이 소비되는 '사회적' 에너지의 양이 너무나 커진다는 점에 있다.

전체 국토 크기는 미국의 한 주의 그것에도 미치지 않는 한국에서, 도시 이론은 자동차 중심의 '개척지' 이론이 적용된 점이 아이러닉 하다. 그러나 '단기간' 발전이란 '속도중심 개발학'의 현 명제에 묻혀 이 아이러닉 한 점은 아이러닉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이 점에 관해 유럽의 초 메머드급 도시라는 파리 (참고로 이 도시는 엄격한 의미에서 '보행불가' 도시라는 낙인을 받고 있다) 의 예를 잠깐 훔쳐보자. 행정구역상 파리의 인구는 200만에 불과하다. 그러나 파리와 일일생활권에 해당하며 동심원 상으로 펼쳐져 있는 일드프랑스 (Ile de France) 인구를 다 합치면 서울의 인구와 비슷한 1200만으로 늘어난다. 일드프랑스의 전체 범위는, 서울의 위성도시의 범위를 다 합친 것 이상으로 넓은 범위에 펼쳐져있다. 여기서 그들의 '보행가능' 도시관이 등장한다.

주황색이 파리시의 경계이다. 지도는 파리를 동심원으로 휘감고 있는 일드프랑스 지역과 파리를 연결하는 대중 교통망을 나타낸다. 물론 이 망은 도로교통망과는 별로로 사람의 운반을 위해 고안된 철도 중심 교통망이다. 파리 교외지역 어디에서나 1시간내에 집에서 파리 사무실로 접근을 가능케 한다는 목적하에, 그들이 고안해 낸 것은 고속전철(RER)이다. 파리 시내를 향하여 거미줄처럼 모이는 이 철도망은, 그 철도망 사이를 횡형 (동심원) 으로 연결하는 도로 대중교통 망으로 완성된다. 현대도시에서 정말 중요한 문제는 물리적 거리가 아니라 시간적 거리 임을 그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중세도시' 파리가 중세도시로만으로 머물러 있지 않은 것이다.

이것이 파리 교외와 시내를 연결하는 고속전철(RER)이다. 필자가 실재로 테스트를 해보니 일드프랑스의 도시중 파리에서 가장 멀다는 동쪽의 디즈니랜드에서 파리의 심장 샤뜰레 Chatelet 까지 정확히 50분이 걸렸다. 파리에 여행오는 여러분이 별 생각없이 타게되는 드골 공항과 시내를 이어주는 전철도 이 '시간적 거리'라는 관점으로 탄생된 RER이다. 전철에 탄 후 재미삼아 시간 계산을 해보라. 파리 어느 지점까지도 1시간이 안 걸린다. 그러나 드골 공항은 파리 생활권 중 '가장' 먼 지점에 해당된다.

서울에서 도로교통망을 중심으로 단기간에 개발된 위성도시 (분당,일산,산본 등) 에 대한 설명을 빠트리고 지나갈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