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정식 도시(유럽식 중정 도시), 블록식 도시(미국식 바둑판 계획 도시), 그리고 블록식 도시의 변종인 섹터형 도시를 죽 짚어오는 이유는, 이 도시들마다 공공 공간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필요한 이유가 서로 상이하기 때문이다.

일단 유럽이 그토록 광장이란 '열린 공간'을 필요로 했던 본연의 이유를 다시 한번 살펴보자.

좁은 길, 자신의 땅에 꽉차게 지어진 낮은 건물, 그리고 사유지인 내정. 이런 식의 도시는 제삼자의 간섭을 받지 않으면 서로의 건물들 간에는 아무런 커뮤니케이션도 존재하지 않는 서로 고립된 상태로 향하기 마련이다. 길은 오직 통행만 이루어지고 자신의 건물이 둘러싸주는 내정에서 '개인적인' 야외활동만이 가능할 뿐이다.

권력자의 힘이건, 종교의 위엄이건, 누군가가 하나의 블록에 '아무것도 짓지 않기로' 결정하는 순간. 그 공간은 비로소 주변을 둘러쌓고 있는 고립된 블록들의 공용공간이 된다. 이 방식에서는 내것과 네것, 그리고 우리의 것의 구분이 아주 선명하며, 그래서 공용공간이 더욱더 사람들이 잘 모여드는 경향이 있다.

사적인 것이 너무나 (거의 고립에 가까울 정도로) 사적이기 때문에, 비로소 나타나는 공적 공간은 밀집과 고립의 갈증을 해결해 주는 '우리 모두의' 공간이 된다. 여러분은 이탈리아 베니스의 좁디 좁은 골목길을 헤메고 다니다가, 갑자기 나타나는 산마르코 공간에서 드라마틱하게 열리는 공간을 경험했을지도 모르겠다. 위와 같은 콘텍스트이기 때문에만 가능한 것이다. 오직 그곳에 와야 다른 건물에서 사는 사람들도 만나게 되고, 필요한 물건도 살 수 있기에 광장이란 것은, 크기와 종류가 다른 생활의 콘트라스트를 도시민에게 가져다 주는 역활을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역사를 통털어 - 최소한 필자가 아는한- 땅을 소유한 토지주들이 조금씩 자신의 땅을 양보해서 시민에게 주었다든지, 혹은 자신의 땅을 무상으로 공공에 아무 조건없이 공원이나 광장으로 불하한 것 같은 아름다운 역사는 없었다. (그만한 인격자가 역사를 통털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시민이라는 것, 공공이라는 것 자체가 엄청난 재화를 기부하는 개인의 입장에서는 정말 불분명한 대상이라는 데에도 그 이유가 있다. 누구에게 주는지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사실 알 수가 없다)

몇세기 전에는 권력자의 명령과 땅의 몰수로 광장이 지어졌고, 지금은 시청의 매입에 의해, 지독히도 열리기 힘든 개인들의 소유지 구석구석에는 숨쉴 수 있는 광장이 들어선다. 수용 당하는 소유자 개인의 입장에서는 관청의 횡포이지만 - 대부분 헐값(공시가격)으로 수용되므로- 정말로 제대로 된 자리에 그 땅이 비워진 체로 남는다면, 그 주변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집 정원에서 나올 수 있도록 허락해준다. 이것이 '공공의 힘'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유럽의 콘텍스트인 반면, 우리의 환경은 또 다르다.

건물을 땅의 내부로 들여서 건물을 지으니 건물은 높아지더라도 길은 시각적으로 넓게 펼쳐져 남게된다. 사적/공적 개념의 구분이 지극히 모호해지고, 자신만의 외부공간이라는 개념 조차 희박해진다. 넓어진 길을 따라 행위들이 빈번하게 발생하게 되고, 사실 어떤 면에서는 건물이 지어진 부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길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두 섹터를 수용해서 광장으로 개조했다고 가정하자. 이미 거리에서부터 도시는 시각적으로 열려 있었는데 어디선가 건물을 굳이 짓지 않는다고 해보았자 유럽의 광장이 주는 콘트라스트에 비해 설득력은 약하다. 길거리에서도 모든 일상 행위등을 경험했는데, 굳이 광장에서 또 무엇인가 기대를 하기에는 그만큼 가치의 강도가 떨어지는 것이다. 섹터형 도시를 즐겨지었던 미국 등 신대륙에서 이런 경우 공원이나 분수 등, 무엇인가를 모여서 '할 수 있는' 광장이 아니라, '쉴 수 있는' 휴식 장소를 선호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가정이지만 바로 여기서, 서울시가 저지른(!) 커다란 오류의 뿌리를 언뜻 보게된다. 본 적도 경험한 적도 없었으니 광장이라는 공공공간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도심지속의 가끔씩 펼쳐지는 넓은 공간과 시원한 잔디! 미국 시찰 중 어디선가 본 것도 같고, 그것이 광장이라고 착각되었을 지도 모른다.

2002년, 한국인이면 모두가 거의 한달은 흥분상태에서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으면 집 밖으로 뛰어나와 모르는 사람과 함께 손을 잡고 촛불을 잡는데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이제서야 "왜 우리에게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함께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없는가?"라는 비로소 도시속의 '우리' 공간의 존재를 질문하게 했다.

해방 이후(혹은 이전이라도), 사람들의 뇌리에 남은 굵직한 역사들은 이상하리 만큼 길에서 (금남로, 서울역 사거리, 광화문 사거리, 그리고 서울시청 오거리...) 생겨났고, 그리고 일견 한국인이 길위에서 지낸 오랜 전통과, 우리 도시의 특성 때문이었다고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혹자는 개발시대, 군부독재자들이 데모가 열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일부러 광장의 건설을 꺼려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사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히틀러는 세계 역사상 가장 단기간에 가장 많은 광장을 건설한 독재자로 남았다는 사실은 동전의 양면같은 논리를 보여준다. 대중을 선동하고 호도하기에도 좋은 곳이 광장이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실재로 유럽의 광장 같은 곳이 서울에 있었다면 4.19와 광주민주화 항쟁이 그곳에서 시발되었을까? (이 점에 관해서는 유럽식 광장은 들어오는 입구를 통제해버리면 곧바로 그곳에 갇혀버리는 구조라는 것을 상기하라. 모르긴 몰라도 4.19때의 선배들은 그 곳으로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국군의 날 행사와 전시 도심 비행장으로 사용되기 위해 남겨진 여의도 '광장'이 없었다면 (후에 공원이 될 수 있었던) 지금 여의도는 오직 아파트와 증권빌딩만 들어찬 이기적인 섬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보다는 그간 경제논리와 개발논리에 너무 충실한(?) 나머지, 공공 공간이란 질문자체를 (나라 전체가) 잊고 있었다는 설명이 필자에게는 더 살갑게 다가온다. 독재자도 원하지 않았지만, 시민들도 필요한지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다.

필자가 진실로 말하고 싶은 것은 - 이미 반세기가 넘게 진행되어온- 경제논리 위주의 도시개발 방향을 원점부터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한국이 유럽이 아니고, 유럽이 한국이 아닌 이상, 그들의 광장을 그대로 복제해서 서울시의 중심에 심어달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왜 우리는 산마르코 광장같이 멋진 광장을 가지지 못하느냐고 어린애같은 투정을 부리고 있는게 아니다. 뿌리가 다르고 환경이 다르고, 전통적으로나 현대 도시 환경의 특성에 기인하여, '길'에서 더많은 시간을 보내오며 '열린 도시'에 더 익숙한 한국인들에게 더 적합한 우리만의 공공공간에 대한 적극적인 실험과 제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도시개발과 구획정리를 담당하는 정책입안자와 집행자들에게 바란다.

신도시개발이고 도심 재개발이고 경제논리와 정치논리 때문에 필요하다면 계속 진행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시간과 조직체의 관성은 어느 순간 갑자기 멈출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초 계획에서 공공 공간에 대한 세밀한 고려없이, 토지를 하나의 논리로만 분할해서 건설사에게 매도하는 관성이 계속되는 한, 일단 팔려진 땅을 나중에 다시 수용해서 공공 공간으로 변환하는 것은, 처음부터 일관된 방향을 잡고 개발하는 것보다 (처음에는 쉬울지도 모르나) 후에는 몇 십배의 갈등과 비용이 요구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2002년에 그랬듯이 이제 서울은 분열된 편린으로써의 도시가 아니라, 서로 섞이기도 할 수 있는 좀더 성숙한 도시를 원하기 시작했다는 증거는 곳곳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행정담당 공무원과 도시계획가, 경제(재정) 전문가 뿐 아니라, '사람이 함께 사는 법'을 연구하고 고민하는 건축가, 사회학자, 인류학자, 예술가 등을 적극적으로 참여시킬 필요가 있다. 하나의 토지개발을 구체화하기 위해 지금까지 해왔던 획일화된 시나리오 구성에서 이제는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멋지고 화려한 건물은 뜻있는 개인이나, 자본과 기획력이 있는 건설사가 충분히 만들 수 있지만, 조화롭고 함께 숨쉴 수 있는 도시는 첫 기획단계에서 고려되지 못하면 그 후로는 거의 실현 가능성이 없는, 그래서 오직 당신들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권력의 힘이 그것을 했지만, 이제는 여러 사람의 뜻있는 합의와 방향설정 만이 그것을 할 수있고 그 중심에는 당신들이 있다.

도시, 건축 동료 전문가 집단에게 바란다.

유럽 답사 중에 본 적 있는 인상 깊었던 산마르코 광장, 시에나 광장, 콩코드 광장은 잊거나 혹은 기억으로 남겨둬라. 원인이 다른 결과물이고, 이해와 소화되지 않은 맹목적인 복사는 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 아직 그 누구도 우리의 콘텍스트에서 가장 적정한 기능을 하는 '광장'은 제안한 적이 없다. 아직 전문가 집단들내에서는 그 토론 조차 시작한 적이 없다. 우리의 도시를 먼저 이해하고, 우리의 도시가 원하는 공공 공간을 제안하고 찾아내는 일은 바로 당신들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건축주가 원하는 건물을 먼저 신경써서 (이쁘게) 그리고, 남는 짜투리 땅에 나무와 잔디를 별 생각없이 그려 넣는 당신들의 습관이 그동안 이 도시에 어떤 결과를 가지고 왔는지 돌아보길 바란다. 당신들이 이 도시를 분열화의 방향으로 끌고 가고 있는 '가해자' 임을 잊지 말기 바란다. 분열의 도시에서 분열을 방조하거나 가속화하는 짓(!), 이젠 그만해야 되지 않는가.

이 글을 끝까지 읽어준 시민들에게 마지막으로 바란다.

좀더 정부당국과 전문가 집단을 비난하라. 서울이란 도시를, 개인과 자본만 살아가는 땅으로 만들어 놓은 당국에 좀더 큰 목소리로 '우리'를 되돌려 달라고 소리치고, 개발논리에 아무런 비판의식 없이 따라오기만 했던 전문가 집단에게 책임방조에 대한 책임을 물어라. 돈을 내지 않고 일상을 보낼 야외공간이 필요하다고 더 큰 목소리로 외쳐라. 그들만의 카르텔 속에 숨겨진 아파트 가격을 더 많은 관심과 더 큰 목소리로 비판하고, 정부와 건설사가 이제 자신들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지경까지 몰아 넣기를 바란다. 당신들이 큰 소리로 외쳐야 한다. 너와 나의 서울이 아니라, 우리의 서울을 만들자고.

조그만 목소리가 모이고 모여야, 전문가들을 자극하고, 자본의 일방적인 논리에 제동을 걸고, 정부 당국을 움직이고, 그제서야 비로소 우리의 땅은 함께 사는 곳으로 바뀌어 갈 것이다. 오늘의 권력은 그 조그만 목소리 속에 있기 때문이다.

ⓒ서현

서울시청의 엉뚱한 짓이 아니었다면, 기술적 난제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잔디 대신에 건립되었을 건축가 서현의 '빛의 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