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상가의 꿈인가, 집단의 광기인가 (1)
 

프랑스의 도시 전통은 무척이나 보수적이다. 몇 백년 전에 지어져, 지금은 거의 생활하기가 힘들어 보이는 건물도 머리를 짜내 내부만 개조하지, 도시의 전경에 할애가 되는 외부는 병적일 정도로 보존하려는 성향이 있다. 특히 파리같은 역사적인 도시에서는 법적인 규제뿐 아니라, 대중들의 인식 또한 개발보단 보전 쪽으로 기울어져있는 것 같다.

이런 성향의 인프라에서 프랑스에 거대한 신도시가 탄생한 것은 다소 의외라고 해야 할 것이다. (주: 우리가 익히 아는 라데팡스 La Défence 또한 파리 중심지의 개발이라기 보다는 시외에 업무지구로 규정되며, 새로이 건설한 신도시의 개념에 가깝다.) 새로운 주거와 업무의 요구에 적합한 '개발과 도시확장'이란 명제와, 관광자원과 역사 유적 보전이란 그들의 보수적 도시관이 타협하면서 생겨난 대안이, 파리 동쪽의 가용 공유 면적 5200 ha (파리 전체 면적은 10,540 ha) , 4개의 지역, 26개 도시에 연구,주거,업무 단지를 건설하는 국가적 거대 프로젝트였던 것이다.

프랑스 정부가 입안한 이 프로젝트는 국가에서 전권을 위임받은 에빠 마른르(E.P.A.Marne)라는 국립 도시 연구소가 1970년 이후 지금까지 모든 도시, 건축, 환경계획을 지휘하고 있다.

특히 이곳에는 시떼 데카르트 Cité Descartes 라고 하는 프랑스에서 최초로 대학 캠퍼스 개념이 적용된 거대 대학도시가 있다. '학교 건축의 실험장'이란 별명이 붙을 만큼 수많은 대학과 연구단지가 들어선 이곳은 다음 연재를 통해 소개될 것이다.

마른라발레는 파리 동쪽 10Km지점부터 횡형으로 펼쳐져 있다. 거대한 녹지에 위치한 모든 도시들은 고속도로와 고속전철로 파리 시내와 30분 내로 연결된다. 도시 건설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런 인프라를 먼저 완성한 점은 평가할 만하다.

 

그런 이유로 마른라발레 지역에서 가장 파리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누와지르그랑 이란 도시가 먼저 '실험대상'이 될 운명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 도시에 가장 먼저 지어진 실험적 성격의 세 건물이 있다. 첫 번째는 리카르도 보필의 아브라삭스 집합주거 Palacio d'Abraxas , 두 번째는 앙리 시리아니의 누와제리 집합주거 Noiseraie, 그리고 오늘 함께 살펴볼 마놀로 뉘네즈의 피카소 집합주거 Arene de Picasso이다.

위 세 건물에 대해 간략한 소개를 하자면, 보필의 그것은 자신의 언어를 약간 과정되게 사용한 네오 클라시즘 형태를 가진 도시 초입부의 상징적 집합 주거이며 고전적 공간 원리, 다양한 바닥레벨을 이용한 배치 계획등이 특징이며, 뉘네즈의 그것은 거대한 광장 둘레로, 독특한 형태를 가진 두 개에 원형 디스크가 주거로 할애가 되고, 주차와 보도의 철저한 분리를 통해, '차없는 거리'를 이룬 심볼리즘 symbolism 적인 곳이다. 반면 유일하게 상징성을 배제한 체 르꼬르뷔지에의 도시 이론에 입각한 교통과 보도의 기능적 분리, 다중 입면을 통한 빛의 다양성을 실현한 시리아니의 그것이 있다.

보필과 뉘네즈의 상징성을 강조한 그것과는 달리, 유일하게 조용한 모습을 지닌 시리아니의 주거단지만이 지금 비판과 재 개조의 굴레에서 벗어나 보인다. 이 말은 보필과 뉘네즈의 이 도시 첫 건물이 신도시의 새로운 이미지를 대표하고 알리기 위한 다소 과장된 형태 로 지어졌으나, 이미 신도시가 나름대로의 성공과 인지도를 가진 완성된지 20년밖에 지나지 않은 지금에 와서는, 주변 건물과의 부조화와 적대적인 입면 그리고 변해가는 도시 프로그램에 대응하기 부적절하기 때문에, 벌써 철거나 개조의 논의가 시작되었다 라는 의미이다.

특히 뉘네즈의 그것은 황홀한 입면과 정제된 광장 등, 높은 건축적 수준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손도 쓸 수 없을 정도로 '슬럼화'가 되어 버려서, 당시 열정적으로 이 프로젝트에 매달렸던 많은 사람들에게 의구심과 절망감을 주기까지 한다.

1982년 완공된, 마놀로 뉘네즈의 피카소 집합주거, 배치 형식은 투시 효과와 기하학적 성격이 강한 고전적 형식을 따르고 있으나, 특이한 형태와 입면 디테일은 예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독특한 인상을 준다

필자가 이 건물을 처음 만난 것은 우습게도, 위에 언급한 도시연구소 에빠 마른르(E.P.A.Marne)에 방문했을 때이다. 마른라발레의 모든 건축,도시 프로젝트의 책임지고 있는 이 연구소 정문 현관에 너무나도 낯설지만, 멋지게 보이는 이 건물 완공사진이 걸려있었던 것이다. 그만큼 이 건물의 건축적 완성도에 대해 자부심이 있다는 말로 들렸다.

1981년, 최종 에스키스 모형, 광장의 실현이란 것이 광장을 둘러쌓고 있는 건물, 조경, 환경요소등 모든 것들에 대한 고도의 연금술이란 점을 상기한다면, 이 모형이 주는 광장의 첫인상은 완성도가 있어 보인다. 더군다나 협동작업의 전통이 강한 유럽 건축계에서, 최고의 '일체화'를 위해 건축가 자신이 건물과 광장을 동시에 계획하는 예외적인 역사를 보여준 작품이기도 하다.

이 광장에 들어가기 전에 잠깐 마놀로 뉘네즈 Monolo Nunez 라는 한국에는 그 이름이 낯선 벨기에 태생 건축가의 경력을 잠깐 살펴보자. 대전 직후 벨기에에서 태어난 그는 부모를 따라 스페인으로 이주해 청년기를 지낸다. 스페인의 혼란한 사회체계에 염증을 느낀 그는 소련으로 무작정 건너가 공산주의 이론에 심취하게 되지만, 곧 파리로 돌아와 건축가로서의 일생을 시작한다. 이 경력에서 그는 사회주의 이론에 많은 기간 노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건축가로서 그는 클래식한 전통건축의 언어와 자신만의 예술적인 재능을 가미해, 특이한 건축 조형으로 이름을 얻게 된다.

파리 시내의 몇 가지 중요 작품 (주로 대규모 관공서) 을 성공시키면서, 그는 신도시의 개발 초기, 이 도시를 대표할 수 있는 거대 주거단지 계획을 에빠마른느에서 의뢰 받는다. '거대 주거 단지'를 위한 프로그램은 이미 수립된 상태에서 초청 설계 경기의 당선자로 그는 이 신도시의 존재를 프랑스 전체에 알릴 임무가 맡겨진 것이다. '새로 태어나는 도시를 알려야 한다"라는 명제가 함정이었을까? 다소 과장된 형태와 복잡한 건축 언어로 포장된 두 개의 디스크 (이 원주를 현지인은 동그란 '까망베르'(프랑스의 유명한 치즈)라고 비꼬며 부른다) 는 이 도시를 지나 파리로 이어지는 고속도로에서 금방 눈에 띨 정도로, 선례를 찾아보기 힘든 특이한 존재였다.

파리로 가는 고속도로에서 보이는 두 개의 거대한 원주, 건축적 평가 이전에 "이 도시에 무엇인가 있다!"라고 광고하려는 의도만은 성공한 것이다. 아무튼...

1982년 이 건물이 완공되었을 때 평가는 다소 긍정적인 편이었다. 독창적인 광장에, 처음 보는 신기한 건물의 형태와 입면, 그리고 주변 인프라의 적절한 설치등으로 이 건물은 신도시의 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원동력이 된다. 당시 유명 자동차 회사의 텔레비젼 광고의 배경으로도 사용되었다고 하니, 아무튼 첫 출발은 기대 이상이었던 셈이었다.

정제된 광장과 이국적인 건물, 이 모든 건물을 먼저 제작된 콘크리트 요소를 '건식 공법'의 조립식으로 실현했다는 것도 또 하나 놀랄 점이다. 또한 프랑스에서는 예외적으로 공사 기간이 3년을 넘지 않았다고 하니, 관의 혜택과 기대가 그 만큼 컸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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