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재일:
20010414
프랑스의 황금 시청시간인 저녁7-12시 사이의 가장 편성 빈도가 높은 텔레비젼 프로그램이 뭔지 아십니까? 쇼, 드라마, 다큐, 버라이어티 쇼, 영화.... 등등 많은 상상이 가능하겠지만, 정답은 우습게도 토론 프로그램입니다. 한 주제를 놓고 몇 명의 게스트가 청중들에 둘러 쌓여 정말 '난상토론'을 벌이는 프로그램을 프랑스 인들은 가장 좋아한다고 합니다.
프랑스 TV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좀 당황했어요. 거의 인신공격에 해당하는 말을 서로 얼굴 붉히면서 몇 시간 동안 계속하고, 관중들은 그 모습을 흥미있게 지켜보고 있는 장면을 보면서, 저러다 싸우게 되면 어떡하지..하고 걱정도 했지요. 그런데 더 웃긴 점은 그 열띤 대화 속에서도 이해 못할 규칙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중 우리에게 가장 어색한 점이, 바로 남의 말이 끝나길 기다리지 않는 그들의 대화습관입니다. 남의 말이 끝나기 전에, 그 말을 잘라 바로 질문하거나, 반론을 제시하지 않으면, 상대방의 의견에 별 관심이 없다는 뉘앙스가 그들의 대화습관에 숨어있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대화의 속도는 굉장히 빠릅니다. 마치 불어를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그건 대화나 토론이 아니라, 싸움이라고 밖에 생각이 안될 정도입니다.
이런 측면은 사회자가 있는 수업시간 , 세미나 등 1:1 토론이 아니라, 1:다수의 토론에도 적용됩니다. 아무도 나 지금부터 말할테니 허락해 달라!라는 표현을 하지 않습니다. 그냥 묻고 싶은 이야기, 궁금한 이야기, 자리와 시간을 안가리고 말을 합니다. 정말 심할 정도로 말을 합니다. 시끄러운 민족이에요. 프랑스인들..
그런데 '양반의 나라' 한국에서 온 나는, 항상 내가 말할 순서를 기다리고, 정말 발표를 하고 싶으면 '손을 들고' 나에게 말할 기회를 달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사회자가 나를 외국인임을 알고, 약간 고려를 해줄 경우는 그나마 질문도 하고, 반론도 하고 그럴 기회가 있었지만, 그렇지 않고, 순수하게 '프랑스 인들끼리의 대화'에 끼었을 때는, 할말은 많은데 타이밍을 못잡아 말 한마디 못하고 돌아오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이것이 조용한 아침의 나라의 문화에 길들어 있던, 한 한국인이 겪게 된 가장 큰 '문화차'이더군요. 말할 때 타이밍...
가만히 기억을 해보니, 내가 받아온 교육과 문화에서는 항상 ' 예의 바르게 ' 행동하고, 말을 해야 했습니다. 근데 이 '예의 바르다'라는 표현 속에는 약간은 '윗사람 지향적'인 뉘앙스가 있더군요. 말하자면 '차별적 예의'란 것이지요. 나와 이야기하는 사람이 나보다 나이가 많거나, 경험이 많거나 할 경우만, 반드시 적용되어야 할 규칙이지, 반대의 경우에는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만약 '윗사람'과 대화시에, 그 윗사람이 "그건 아니야!'라고 큰소리로 한마디했을 때, 만약 '그게 왜 아닙니까?"라고 그 앞에서 반문을 하면, 그것은 정말 궁금해서 하는 순수한 질문이 아니라, " 예의없고 건방진 " 뉘앙스로 다가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경우, 상호평등한 토론이 되기보단, 일방적인 훈계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지요.
사람이 사회적인 동물인가 봅니다. '말 수 적고, 점잖은 신사 (죄송^^) 다'란 말을 많이 듣던 나도, 이 시끄러운 민족과 몇 년 지내다 보니, 말수가 많아지고, 말할 때 망설이거나, 눈치 보는 습관도 좀 바뀐 것 같더군요. 요즘은 그냥 말합니다. 알거나 모르거나 말이지요. 알면 안다고, 모르면 모른다고... 말하는게 편해지니, 생각하는 것도 편해지더군요.
그런데 내가 "내 자신이 변했구나..." 라고 느낀 것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바로 한국에 있는 스튜디오 후배들과, 사이버 토론을 거의 1년가량 해오면서 였지요. 내가 '나이'가 가장 많고, 대학 학번도 가장 높긴 하지만, 어느 순간 후배들과 토론하는 것이 무섭다!라고 느끼게 되더군요. 이 '무섭다!'라는 의미는, 그냥 이곳 프랑스 아이들에게처럼, 편하게 "내게 너의 생각을 말해봐!"라고 물어보면, 그 말을 한국에 있는 후배들은 "아~~~ 저 형이 내 질문에 기분이 상했구나. 조심해야겠다." 라고 미리 생각해 버리고, "예, 그렇군요. 한수 배웠습니다." ...... 란 ' 예의 바른 ' 대답 후에 입을 다물어 버립니다.
분명 궁금한게 있을텐데, 저쪽에서 대꾸가 없으니, 나 또한 그 토론을 이어 나가기가 힘들어지지요. 그런 순간이 겹치다 보니, 점점 내가 어떻게 질문을 해야지, 저쪽에서 주눅들지 않고, 편하게 대답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되고, 협박도 해보고, 토닥거려보다가도, 점점 더 '윗사람 공경하는 문화'에서 안되는 것이 있구나...하고 체념해 버리는 경우가 많아집니다.
"내게 말을 해봐"을 불어로는 Dis moi!라고 합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주눅'들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시간은 언제 올까요? 그 대상이 분명 '높으신 임금님'도 아닐텐데, 왜 우리에겐 이렇게 '알아서 기어야' 할 것이 이리도 많을까요. 눈치 안보고, 주눅 안들고, 평등하게, 솔직하게, 그리고 생각한대로... 말할 수 있는 시간이 분명 오긴 와야 됩니다. 왜냐하면, 문제없는 일이 없고, 문제없는 가정이 없고, 문제없는 사회와 국가가 없지만, 이 문제를 해결한 유일한 방법은 위와 같이 말하는 바로 '대화'속에 숨어있으니까요.
다 아는 이야기라구요? 그러면 당신은 이 당연한 아는대로 행동하고 있습니까? 지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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