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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도시는 시민을 믿지 않는다
도시 : 파리 Paris
국가 : 프랑스 France
게제일 : 2004 02 25

도시는 시민을 믿지 않는다 (1)

도시와 시민

제목만 보고 이 글로 링크해 들어온 독자들은, "도시는 시민을 믿지 않는다!" 라는 다소 자극적인 타이틀에 분명 의문점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본 리뷰는 파리와 몇몇 유럽의 대도시에서 목격된 몇가지 도시 시설물들과 시민들간의 관계성(relationship)에 관한 짧은 보고서이다.

용어 정의 하나가 필요하다. 여기서 말하는 '도시 시설물'이라 함은 반드시 우리가 Street Funiture라고 부르는 벤치, 가로등, 공중전화박스 등 도심 가로 시설물 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더나아가 횡단보도 등 전반적인 도로 체계를, 장애자의 통행을 도와주는 지하철 리프트, 한 건물의 전면을 장식하고 있는 멋진 나무 한그루, 건물에 오밀조밀 매달린 조그만 간판들 또는 건물의 옥상층에 서있는 대형 전광판... 등, 건물과 도로 같은 도시의 '하드웨어'적 요소들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소프트웨어적) 시설물들이 이 범주에 포함된다.

파리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면서 "도시는 시민을 믿지 않는다!"는 부제를 달고 있다면, 서울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도시는 시민을 믿고 싶어한다!"라는 부제로 또 다른 글을 쓸 수도 있을 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도시가 시민을 '믿고 안믿고'는 도시의 상황에 따른 아주 상대적인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필자가 이야기하는 '믿고 안믿고'라는 의미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누가 누구를 믿는다는 이야기인가? 이것부터 설명하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

파리는 세기를 통털어 유럽의 수도로 불려온 곳이다. 말하자면 왕족과 귀족의 영토 분쟁의 번잡스러움 뿐 아니라, 유럽의 모든 이방인이 이곳으로 모이려는 경향을 가진 만큼, 파리에 살고 있는 거주인들은 이방인 (남이란 개념의 공공) 에 대하여 적대적인 즉 폐쇄적인 성향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은, 앞서 소개된 파리의 정원 에 대한 리뷰에서도 언급된 바 있다.

침략과 방어, 그리고 이주와 피난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는 서구 유럽의 도시들에 비해, 한국의 전통도시 (그리고 그 영향이 어느정도 남아있는 현대도시들) 는 '상대적으로' 평안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거기에다가 민족 구성의 단순성 때문인지 다양한 문화의 충돌 또한 상대적으로 약했기 때문에, 각 건물들의 공공을 향한 적대성 또한 약했을 거란 가정 또한 가능해 보인다. (이 말을 이해하기 힘들다면 한국 전통 민가에서 항상 목격되는 낮은 담장들의 의미를 잘 생각해보자. 공공이 자신의 공간에 대해 시각적으로 침범하는데 대해 관대하다는 의미이다. 항상 친밀한 이웃들과 문화상황에서 살았던 우리 조상이기에 가능했던 것들이다. 그에 비해, 외지인의 유입이 빈번했고 문화적인 분쟁이 심했던 서구의 큰도시에서 이런식의 '인심좋은' 담장들은 거의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발꿈치를 들면 남의 집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훔쳐볼 수도 있고, 마음만 먹으면 뛰어넘을 수도 있는 이 150-180센티 밖에 되지 않는 한국의 전통 담장은 한국적 도시관을 설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이런식의 '인심좋은' 담장은 서구에서는 상상할 수 조차 없는 관점이다.

위에서 언급된 "도시가 거주민을 믿는다"는 의미는 "시민들끼리의 상호 간섭/침범에 대한 상호 관용성"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쉽게 말하자면 서구유럽의 여러 도시들처럼 각자의 프라이버시 보호 측면이 강하고 토지에 대한 공공성/개인성의 구분이 명확한 곳에서는 제삼자가 다른이 소유의 토지와 영역에 (시각적으로 혹은 물리적으로) 간섭하거나 침범하는데 대해 관용성이 없다 (즉 참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 도시는 제삼자의 간섭이나 침범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갖가지 고안된 시설물을 설치하려는 경향이 있다. 가장 쉬운 방법이 높은 벽과 두꺼운 방어문이 될 것이고 조금 지능적인 방법으로는 공간적인 처리나 심리적인 억제효과들이 있다. (구체적인 예는 뒤에 소개될 것이다)

[1] 도시의 구성원의 개체가 다양할수록,
[2] 그들간의 밀도가 높을수록,
[3] 그리고 그들사이에 문제점과 분쟁의 발생이 빈번할수록,
이런 '고안된' 시설물은 점점더 강화되고 지능화되기 마련이다.

영국 런던의 한 지하철 내부 벤치. 한국 같으면 여러명이 그냥 서로 알아서 앉을 수 있도록 단순하고 길다란 벤치였을텐데, 여기서는 '딱' 4명밖에 앉을 수 없도록 팔걸이로 구분을 해 두었다. 오늘의 주제를 잘보여주는 장면이다. 왜 구분을 해두었을까?

프록세믹스 proxemics

미국의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Edward T. Hall)의 탁월한 저서 [숨겨진 차원] (The hidden dimension)에서는 흥미있는 공간 개념 하나가 제시된다. 프록세믹스라고 이름 붙여진 이 개념은 인간과 인간이 사회적 관계를 만들어가기 위해 감내할 수 있는 거리가 각 문화권마다 차이가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예로 같은 서구에서도 프랑스나 이탈리아 같은 라틴문화권은 영국이나 미국같은 앵글로 색슨문화권보다 개개인간의 물리적 거리를 인내하거나 선호하는 정도가 훨씬 높다. 반대로 서로간의 거리가 멀어졌을 경우에 커뮤니케이션의 어려움을 느끼는 정도도 라틴문화권에서 훨씬 심하게 느낀다고 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이 홈의 에세이 한 코너에서는 한국과 프랑스의 국회의사당의 공간구조를 비교함으로써 커뮤니케이션의 원활도에 대해 살펴본 적이 있었다.)

"프랑스에서 찍은 두 장면, 빽빽한 카페 테이블의 배치와 옥외연설을 듣는 사람들의 혼잡한 모습은 북유럽인, 영국인, 미국인들보다 가까이 모이는 프랑스인의 성향을 보여주며 이들의 프록세믹스 패턴에 탁월한 증거가 된다. 그리고 이 밀집된 프록세믹스에 따른 '고도의 감각적 개입'은 프랑스인의 생활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 에드워드 홀 [숨겨진 차원] 중에서.

개인간의 편안함을 느끼는 상호간의 거리가 지구상에서 가장 먼 민족중에 하나인 미국인 학자 에드워드 홀에게는, 라틴유럽인의 가까운 상호 거리에 기인한 생활방식이 생소했음은 짐작이 가고 남는다. 그리고 미국인보다는 가깝지만 라틴 유럽인보다는 '편안한 인간사이의 거리'가 먼 한국인인 필자의 눈에도 처음엔 역시 생소했다.

한국의 독자들은 고급 프랑스 식당이란 이미지(!)를 연상한다면 - 물론 사치스런 실내장식과 함께 - 하얀 식탁보를 덮은 넓은 테이블을 쉽게 떠 올릴 것이다. (만약 두명이 한 테이블에서 식사를 한다면 한 사람과 다른 사람의 거리는 넓은 테이블 때문에 상당히 멀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히 이야기해 한국에 있는 몇군데 고급 프랑스 식당의 그것일 뿐이고, 실제로 프랑스에 있는 고급 식당의 테이블은 여러분의 생각보다 훨씬 크기가 작다. (즉 서로간에 의자의 거리는 앞사람의 무릎이 다을 정도로 옆사람의 어깨가 부딪힐 정도로 가깝다는 말이다)

식당 뿐만이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를 맺는 모든 공간에서 이런 가까운 상호 거리는 쉽게 목격된다. 두 사람만 들어가면 문을 닫기도 힘든 엘리베이터, 앞 승객의 무릎 접촉을 피하기 위해서 다리에 힘을 주고 앉아 있어야하는 지하철 내 좌석배치, 나오는 사람과 옷깃을 스쳐야만 하는 큰 공공건물의 조그만 주 출입구...

모두에게 익숙한 파리의 아랍문화원(건축가: 장누벨) 전면부를 본다. 빨간색으로 표시된 곳이 이 건물의 주 출입구이다. 사진을 유심히 살펴보면 전체 입면에 비해 출입구가 유난히 협소하다고 느낄 것이다. 그늘속에 숨어있는 주 출입구는 겨우 두사람이 동시에 지나칠 정도로 폭도 좁고, 높이도 손을 올리면 천장이 다을 정도로 낮다. 이 건물을 처음 방문한 외국인들은 화려하고 과장된 입면과 비밀스러운 출입구 사이의 이 기묘한 스케일 처리에 어리둥절 할 것이다.

정말 재미있는 점은 위의 사진과 함께 에드워드 홀이 이야기하는 프랑스인의 '고도의 감각'이 존재하는가 하는 점이다. 이런 식의 감각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인이나 미국인의 경우, 옆사람과의 가까운 거리에서는 원치않는 신체적 접촉을 피하기 위해 얼마간의 의식적인 정신적/육체적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노력이 프랑스식 고도의 감각에 대한 학습의 시작이라고 하면 옳은 비유일까.

이 극단적으로 가까운 거리 상황에서도 그들은 서로와 서로의 육체적 접촉을 아주 '미묘한 타이밍'으로 피하는 법을 알고 있다. 아주 복잡해 보이면서도 그들끼리는 -매우 가까울 지언정- 서로의 거리를 유지하는 감각을 지니고 있다. 마치 더듬이로 서로의 충돌을 피하는 벌레들처럼 말이다.

처음 파리를 방문한 외국인이 이 감각에 적응하지 못하고 지하철 안에서 식당에서 이 사람 저 사람과 부딪히며 진땀을 흘리며 속으로 (좁다고) 투덜대고 있는 반면, 그들은 그들의 프록세믹스 패턴속에서 그들끼리 감각의 상호작용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실제 물리적 공간은 좁은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민감한 감각 작용 덕분에 아주 넓게 살고 있다는 말이다.

가까운 프록세믹스와 그에 따른 고도의 감각개입에 관한 쉬운 예를 하나 더 들어 보자. 여러분은 영화에서 프랑스식 인사인 볼을 서로 두세번 부딪히는 장면을 익히 보았을 것이다. 파리에 처음 온 미국인 또는 한국인은 인사를 하려고 다가서는 파리지앙의 볼에 아주 어색한 동작으로 (주로 엉덩이는 뒤로 빼고 어느쪽 볼부터 이 이상한 예식을 시작해야 하는지 망설이며) 자신의 얼굴을 상대의 볼에 결국은 부딪혀 버린다(!). 민감한 파리지앙들은 '무례한' 속도와 강도로 자신의 얼굴로 돌진하는 이 외국인이 눈치체지 못하도록, 접촉의 순간 짦게 자신의 얼굴을 후퇴시킴으로써 얼굴끼리의 충돌을 방지한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이 '둔한' 외국인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한다.

이런 식의 감각개입은 그들의 생활 곳곳에 반영된다. 그리고 한 민족의 감각이 절정체인 도시 곳곳에서는, 그들의 민감한 감각의 증거들이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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